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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이에의 강요 / 파트리크 쥐스킨트

    작성일 21-05-04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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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no_profile 백인경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조회 3,406회 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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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이에의 강요 / 파트리크 쥐스킨트



    소묘를 뛰어나게 잘 그리는 슈투트가르트 출신의 젊은 여인이 초대 전시회에서 어느 평론가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그는 악의적인 의도는 없었고, 그녀를 북돋아 줄 생각이었다. 

    「당신 작품은 재능이 있고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아직 깊이가 부족합니다.」 

    평론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젊은 여인은 그의 논평을 곧 잊어버렸다. 그러나 이틀 후 바로 그 평론가의 비평이 신문에 실렸다. 

    「그 젊은 여류 화가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고, 그녀의 작품들은 첫눈에 많은 호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것들은 애석하게도 깊이가 없다.」 

    젊은 여인은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이 그린 소묘를 들여다보고 낡은 화첩을 뒤적거렸다. 완성된 작품뿐 아니라 아직 작업 중인 것들까지 전부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물감통 뚜껑을 닫고 붓을 씻은 다음 산책하러 나갔다. 

    그날 저녁 그녀는 초대를 받았다. 사람들은 비평을 외우고나 있는 듯이 그림들이 첫눈에 일깨우는 호감과 많은 재능에 관해 연신 말을 꺼냈다. 

    그러나 주의 깊게 귀기울여 들으면 뒤편에서 나지막이 주고받는 소리와 등을 돌리고 있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젊은 여인은 들을 수 있었다. 

    「그녀에게는 깊이가 없어요. 사실이에요. 나쁘지는 않은데, 애석하게 깊이가 없어요.」 

    그 다음 주 내내 그녀는 전혀 그림에 손을 대지 않았다. 말없이 집 안에 앉아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는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그것은 깊은 바다 속에 사는 무지막지한 오징어처럼 나머지 모든 생각들에 꼭 달라붙어 삼켜 버렸다. 

    「왜 나는 깊이가 없을까?」 

    두 번째 주 그녀는 다시 그림을 그리려 시도했다. 그러나 어설픈 구상이 고작이었고, 때로는 줄 하나 긋지 못하는 적도 있었다. 마침내는 온몸이 떨려 붓을 물감통에 집어 넣을 수조차 없었다. 그러자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면서 소리질렀다. 

    「그래 맞아, 나는 깊이가 없어!」 

    세 번째 주 그녀는 미술 서적을 세심히 들여다보고 다른 화가들의 작품을 연구하고 화랑과 박물관들을 두루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미술 이론 관련 서적들도 읽었다. 그리고는 서점에 가서 점원에게 가지고 있는 가장 깊이 있는 책을 요구했다. 그녀는 비트겐슈타인인가 하는 사람의 책을 받아 들었지만, 그것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시립 박물관에서 개최된 전시회 〈유럽 소묘 5백 년〉에서 그녀는 미술 교사가 인솔하는 학생들을 따라갔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 앞에서 불쑥 앞으로 나선 그녀는 물었다. 

    「실례지만, 이 그림에 깊이가 있는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미술 교사는 그녀를 보고 비죽이 웃으면서 말했다. 

    「나를 놀리실 생각이라면, 그보다는 더 나은 것을 생각하셔야죠, 부인.」 

    학생들이 깔깔대며 웃었다. 젊은 여인은 집으로 가서 몹시 비통하게 울었다. 

    젊은 여인은 점점 이상해져 갔다. 화실을 비운 적은 거의 없지만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다. 깨어 있기 위해 약을 먹으면서, 무엇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피곤해지면 의자에 앉은 채 잠이 들었다. 잠이 깊이 들까 두려워 침대에 눕기를 꺼렸기 때문이다.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밤새도록 불을 켜 두었다. 그림은 더 이상 그리지 않았다. 미술품 상인이 베를린에서 전화를 걸어 그림 몇 장을 청했을 때, 그녀는 전화에 대고 소리쳤다. 

    「나를 내버려두란 말이에요! 나는 깊이가 없어요!」 

    간혹 점토를 반죽할 때도 있었지만 특별히 무엇을 만들지는 않았다. 그저 손가락 끝으로 후비거나 작은 경단을 빚었을 뿐이다. 

    그녀의 외모는 피폐해져 갔다. 옷차림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집은 손질하지 않아 쇠락해 갔다. 

    그녀의 친구들이 걱정을 했다. 그들은 말했다. 

    「그녀를 돌봐 주어야겠어. 그녀는 위기에 빠져 있어. 인간적인 위기이거나 그녀의 천성이 예술적인 것 같아. 아니면 경제적인 위기일 수도 있어. 첫번째 경우라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고. 두 번째 경우는 그녀 자신이 극복할 문제야. 세 번째라면 우리가 그녀를 위한 모임을 개최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녀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일지도 몰라.」 

    그래서 그들은 식사나 파티에 그녀를 초대하는 것으로 그쳤다. 그녀는 매번 작업해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러나 그림은 전혀 그리지 않고 방 안에 앉아 우두커니 앞을 응시하거나 점토를 주물럭거렸다. 

    한번은 자신에게 너무 절망하여 초대를 받아들인 적이 있었다.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한 어떤 젊은이가 잠자리를 같이하기 위해 그녀를 집으로 데려가려 했다. 자신도 그가 마음에 들었으니 원한다면 그렇게 하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깊이가 없으니 각오하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 말을 들은 젊은 남자는 단념했다. 

    한때 그렇게 그림을 잘 그렸던 젊은 여인은 순식간에 영락했다. 그녀는 외출도 하지 않고 방문도 받지 않았다. 운동 부족으로 몸은 비대해졌으며, 알코올과 약물 복용 때문에 유달리 빠르게 늙어 갔다. 

    집 안 여기저기 곰팡이가 슬기 시작했고, 그녀에게서는 시큼한 냄새가 났다. 

    그녀는 3만 마르크를 상속받았었는데, 그것으로 3년을 살았다. 이 시기에 한번 나폴리로 여행을 갔었다. 어떤 상황이었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녀에게 말을 건 사람은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이 웅얼거리는 소리만을 들었다. 

    돈이 떨어지자, 그 여인은 자신이 그린 그림들을 전부 구멍내고 갈기갈기 찢었다. 그리고는 텔레비전 방송탑으로 올라가 1백 39미터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러나 이날 바람이 몹시 거세게 불었기 때문에 그녀는 탑 아래 타르 포장된 광장에 떨어져 으스러지지 않고, 넓은 귀리밭을 가로질러 숲 가장자리까지 날려 가 전나무 숲 속으로 떨어졌다. 그런데도 그녀는 즉사했다. 

    주로 스캔들을 상세하게 보도하는 대중지들이 감지덕지 그 사건에 덤벼들었다. 자살 사건, 바람에 날려 간 흥미로운 경로, 한때 전도 양양했고 미모도 뛰어났던 여류 화가의 이야기라는 사실은 보도할 가치가 아주 높았다. 그녀의 집은 재앙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보였으며 기자들은 환상적인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널려 있는 수없이 많은 빈 병, 여기저기 파괴의 흔적, 갈기갈기 찢겨 나간 그림들, 벽면 어디를 둘러봐도 점토 덩어리, 심지어 방구석에는 배설물도 있었다! 사람들은 그 사건을 두 번째 톱기사로 다루는 모험을 감행했으며, 그것도 모자라 3면에서 기사를 계속했다. 

    앞에서 말한 평론가는 젊은 여인이 그렇게 끔찍하게 삶을 마감한 것에 대해 당혹감을 표현하는 단평을 문예란에 기고했다. 

    「거듭,」 그는 썼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젊은 사람이 상황을 이겨낼 힘을 기르지 못한 것을 다 같이 지켜보아야 하다니, 이것은 남아 있는 우리 모두에게 또 한번 충격적인 사건이다. 무엇보다도 인간적인 관심과 예술적인 분야에서의 사려 깊은 동반이 문제되는 경우에는, 국가 차원의 장려와 개인의 의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결국 비극적 종말의 씨앗은 개인적인 것에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소박하게 보이는 그녀의 초기 작품들에서 이미 충격적인 분열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사명감을 위해 고집스럽게 조합하는 기교에서, 이리저리 비틀고 집요하게 파고듦과 동시에 지극히 감정적인, 분명 헛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피조물의 반항을 읽을 수 있지 않은가? 숙명적인, 아니 무자비하다고 말하고 싶은 그 깊이에의 강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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