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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수필 단편) 나는, 오늘 여기, 너를 두고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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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_image 작성자 no_profile 양승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906회 작성일 23-03-01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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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날은 유달리 날씨가 좋았다.

삼삼오오 모여 피는 벚꽃들이 집 앞 개천을 따라 흐드러지게 피는 계절이었다.

평소 꽃을 좋아하는 나였기에,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궁의 아름다운 광경을 구경하자.

하고 쉽게 생각하여 일정을 잡았다.

그렇다. 분명 아무 생각이 없을 터였다.

오전 일찍 출발한다 마음을 먹었건만 정작 종로 3가 역에 내린 시간은 정오였다.

아무렴 어때 하고선 점심을 간단히 먹고. 조금은 설레는 마음을 가지고 창덕궁으로 향했다.

가는 길, 신기한 건물의 외형을 보고 소란을 피는 아이를 보며 웃음짓다가

유달리 많은 연인들의 모습에 아, 하고서는 잠시 아련한 감정를 마주했다.

그러다 애써 그 감정을 무시하고 입장권 판매대로 향했다.

그제서야 알게 된 것이 한복을 입고 오면 입장이 무료라는 것.

아차 싶었다. 며칠 전에 생활한복을 주문했는데 아직 받아보지 못하였기에

조금 일정을 뒤로 미룰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잠깐.

하지만 얼마 되지 않는 돈은 가볍게 소비하고, 이내 창덕궁 안으로 들어섰다.

입구에서 팜플렛을 집고 한번 슥 훑어본 뒤, 그곳의 조금 고양된 분위기를 느꼈다.

색색의 꽃들은 궁 안에 들어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기분을 들뜨게 만들었고,

나 또한 그에 편승하여 기분 좋은 바람을 느끼며 느린 걸음으로 이곳 저곳을 둘러보았다.





몇개의 문을 지나자 널찍한 흙길이 나를 반겨주었다.

이전에도 몇번 와본적이 있던 풍경. 언제나 혼자였던 기억.

그랬었다, 매번 창덕궁에 올 때는 누구도 없이 혼자 방문하여 시간을 보내다 돌아가곤 했다.

'이번에는 너와 함께 오고 싶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순간 이게 무슨 생각인가 싶어 머리를 흔들고 이 그리움을 떨쳐내고 싶었다.

이제 너와 나는 모르는 사람이니까.

나는 너에게 상처를 받고, 너는 나에게 상처를 받아서

우리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기로, 그렇게 이야기했으니까.

그게 자그마치 반년 전의 이야기니까.

나는 그것에서 초연해지려 노력했다.

오늘은 단지 매화와 벚꽃을 보고싶어서,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꽃들을 구경하다

좋은 기분으로 집에 돌아가려고, 그렇게 마음먹고 외출했으니까.

하지만 그리움과, 무엇인지 모를 이상야릇한 감정이 조금 섞인, 그것은

나에게서 멀어지지 않고 오히려 조금씩 나를 침습해왔다.

한번에 젖어드는 것이 아닌, 물기가 있는 바닥에 한지를 깔아두듯

조금씩, 정말 천천히, 

모르는 사이에 그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는

관자놀이를 타고 머리를 감싸 안아, 결국 나의 눈을 덮는 지경에 이르렀다.



너무 그것에 잠기지 않으려고 일부러, 이것, 저것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줄기를 길게 늘어뜨려 담장을 넘은 매화나무를 한장 찍어 가족에게 전송.

갈림길 양 옆에 핀 개나리와 철쭉을 또 한장 찍어서 전송.



무리였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해 흩어버리지 않고, 생각없이 쌓아두기만 했던 것들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자꾸만 모아뒀던 것들이,

결국 이렇게 눅진하게 응어리져 내 목구멍을 틀어막고, 나를 옥죄는구나. 싶었다.

속절없이 그것에 잠겨 정처없이 걸음을 옮기다 

잠시 멈추어 깊은 생각에 잠긴 상태로 꽃들을 바라보았다.

아. 하늘이 참 맑고, 꽃은 또 아름답구나.


그리고

이것을, 너와 함께 누렸다면 그것 또한 좋았을텐데.

여기까지 와서는 더 이상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하지만 대처할 수 없이 나에게 엉켜든 그것은

이미 내가 어찌 손 쓸 수 없는, 내 마음속에서의 거대한 물결이 되어있었다.


그 흐름에 휩쓸려 기계적으로 걷다보니 어느새, 나는 창경궁 매표소 앞에 서 있었다.



창경궁 입장권을 구매하고, 창경궁으로 들어섰다.

돌담을 따라 길게 늘어선 개나리.

맞은편에는 경사를 따라 나무가 자랐고, 그 너머로는 멀리 남산이 보였다.

내려다보이는 궁의 기와 위로는 저 너머 공사 크레인이 삐죽 솟아올라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듯, 이상하게 아름다운 조형미를 주었다.


코너를 돌아 시야에서 남산이 사라지고,

양 옆으로 나무가 가득한 숲길로 들어서자

잠깐이나마 잊고 있던 그것이 다시금 나를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자신을 잊지 말라는 것처럼, 내 손끝과 발끝을 간질간질.

나는 도대체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반년이 넘은 지금에 와서 이렇게까지 나를 괴롭게 만드는지.

밝은 미래는 그려지지 않아 미련없이 떠난 그 관계를

이제는 노스텔지어에 젖어 자꾸만 곱씹으며 눈을 흘기는지.


경사진 흙길을 따라 나무가 우거진 곳을 지나니 저 멀리 커다란 연못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연못을 따라 둘러진 낮은 울타리를 따라 걷는 너의 모습.

보일 리 없는 그 뒷모습이 내 눈에 아른거렸다.

그것이 착각이고. 내 눈에 아직 남은, 너에 대한 미련이 모습을 갖추어 나를 희롱하는 것이라

그렇게 생각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새 나는

우리 함께 왔다면 네가 이곳에서 남겼을 발자국을

내 걸음으로 꾸욱 눌러가며 따르고 있었다.


너와 함께 왔다면

네가 참 좋아했을 것 같은 연못의 비단잉어가

네가 참 이뻐했을 것 같은 대온실의 온도와 풍경이

우리 같이 사진을 찍자고 말했을 것 같은 나무가

앞으로 더 이상 오지 않을 날들이

깃털처럼 내 뺨을 간지럽히는 봄 햇살과, 가볍게 나를 껴안고 지나가는 봄바람 사이에

조금씩 녹아 이 곳에 흩뿌려지는 것 같았다.

연못을 크게 돌아 대온실을 지나서 맞은편의 능수버들 밑에 도착했다.

잠시 쉬어가자 하고 그 아래 널찍한 돌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연못 수면에 부딪혀 잘게 부서진 햇볕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바라보았다.


내 이 옆자리

네가 앉아있었더라면

나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우리 무슨 대화를 나누었을까.

아, 이제는 오지 않는다.



우리 그런 날들이



앞으로 내가 살아갈 세계에는

골방 속 추레한 남자의 상상으로만 존재 할 것이다.


하지만.


연못 안의 잉어가

수면에 입맞춰 작은 파형을 그린 그 시점에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짜피 오늘 너를 내 의지대로 떨쳐내지 못하는 것이라면.

충분히 너를 느끼고, 그리워하고, 네 생각에 푹 잠겨들어 

온 몸이 네 색으로 물들 때까지 이 곳에 머물자.

더 이상 미련이 남지 않을 만큼. 

네 생각이 내 머릿속에 휘몰아쳐 그 바람에 삭아 내 자아가 스러질만큼.


그리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자.

오늘은 그렇게 하자.

그리고 그렇게, 미련이 남지 않을 정도로 마음껏 네 생각을 하고 난 뒤에

여기에 너를 남겨둔 채 돌아가자.

그렇게 생각했다.


정말 마법 같은 일이었다.

분명 그리움과 아련함, 마음 속의 먹먹함은 남아있지만

그것이 슬프고 나를 해치는 감정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마치 슬픈 영화를 보는 것 처럼.


그래, 이건 슬픈 로맨스 영화다.

이 장소에서, 내 마음속에 재생되는

청춘의 슬픈 로맨스 영화.



그래서 그것을 떨쳐내려 하지 말고

그것에서 도망치려 하지 말고

너라는 영화의 감상이 끝나면,

여운만을 가지고 집에 돌아갈 수 있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생각이 정리 된 순간 몸이 가벼워졌다.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좀 전과 같은 무거운 걸음걸이가 아니었다.

조금 더 느려지고, 여유로워진 걸음걸이로

한 걸음마다 너를 생각하고, 너와의 오늘을 상상하고

우리 지난 날을 떠올렸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창경궁의 막바지였다.

나무와 꽃이 우거진 산책길은 끝을 맺고,

다시 널따란 흙길과 궁들이 보였다.

나무가 없으니 하늘이 보이고

하늘을 바라보니 하늘이 보랏빛인 듯 느껴졌다.

네가 좋아하던 색깔.

내 안에서 너를 떠올리면 풍겨오는 체취와 함께, 제일 먼저 떠오르는 추상적인 풍경

보랏빛.

보랏빛 하늘과, 보라색 옷을 입은 너.

내 가슴에 머리를 올리고 새근새근 잠이 들어

그 머리를 쓰다듬던 우리의 그 시간이.

내 마음속에선 모두 보랏빛의 그림으로 남아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창경궁과 창덕궁을 모두 돌아

출입구를 지나 밖으로 나왔다.

후련했다.

가벼웠고

너는 저 곳에 남았고, 나는 이제 홀로 앞으로 나아간다.

우리 헤어진지 반년이지만, 그 반년동안 나는 정말로 혼자이지 않았나보다.

항상 내 옆에 떠나간 너의 마지막 말이 따라붙었고,

먹고, 마시고, 자고

그 모든 홀로 행했던 것들이

옆에 있을 리 없는 너와 함께였었다.

네 그림자와, 체취, 체온만 내게 남아

혼자일 때에도 혼자가 아니였었나보다.

하지만 오늘,

창덕궁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지금.

나는 비로소 혼자가 되었다.

너를 뒤로 하고

우리 지난 날을 뒤로 하고

그 모든 것을을 여기에 남기고




나는, 오늘 여기. 너를 두고 갈게.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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